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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성촌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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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남문중(서암공파) 성주 뒷개

1. 성산배씨 집성촌인 도남리는 뒷개(후포 ), 청룡, 자리섬(전인), 갈밭(신안)은 대가면의 서쪽 33번 국도 대천리에서 금수강산면으로 오 리 정도 서북쪽에 위치해 있다. 

● 성주 뒷개 마을의 지리적 환경

뒷개 마을은 도남천 주변으로 자연 마을이 산재해 있는데, 서북쪽으로 도장골산(520m)의 줄기가 뒷개 마을로 이어지고, 자리섬은 할머니의 치마폭으로 감싸듯 할미산성(300m)이 있다. 뒷개 마을은 1920년 대홍수로 마을 전체가 피해를 보아 현재의 자리와 갈밭, 청룡 마을로 이주하였다. 서암 배덕문 선조께서 마을 형국이 행주형이어서 배가 떠난 뒤 남아 있는 나루라 하여 뒷개(후포)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다.

● 뒷개(後浦)

이 마을은 성산배씨의 집성촌인데 서암 배덕문(1525~1602)이 복고를 정했고 아들 서강 배설(1551~1599)은 무과에 올라 임진왜란 때 원균을 도와 큰 공을 세웠고, 사후 병조판서로 추증되었다. 배설의 아들 등암 배상룡(1574~1655)과 괴재 배상호는 문해와 필법에 능한 명사였다. 마을 안에는 도남재와 영각과 배현 진사공 보사단비가 있고, 숭조대에는 서암 배덕문 신도비 증 이조판서, 배설 장군 신도비 증 병조판서, 고암 배건, 등암 배상룡 증 좌승지, 괴재 배상호 증 병조참의, 명암 배즙 증 병조참판 유허비가 있다.

● 자리섬(전인,城谷)

뒷개 마을 동북으로 있는 자리섬은 할미산성(300m) 아래 남향으로 있는 마을이다. 이곳의 식호정은 고촌 배정휘(1645~1709)가 辞官歸鄕해서 1707年(肅宗33年)에 오형제의 友誼를 담아 성주댐 아래 강정에 지었는데 1907년 200년 되는 해에 후손들이 이건했다. 마을 안 전인재는 괴재 배상호를 추모하는 곳이다.

● 갈밭(蘆田, 新安)

뒷개 마을 동쪽의 도로에서 조금 들어 앉은 마을이다. 입구에 노송과 팽나무, 우뚝한 선바위가 유서 깊은 성산배씨 집성촌임을 알린다.

▶ 도남1리 마을전체

▶ 자리섬 마을 전경

 ㅇ 성산성주 배씨 진사공파 서암공 세계도

주 토성의 하나인 성산배씨는 배인경이 고려 충숙왕 때, 흥안부원군에 봉해지면서 흥안(지금의 성주)을 본관으로 성산성주 배씨로 불린다. 신라 개국 공신 지타공이 시조이며 고려 개국 공신 배현경이 중시조이며 성산배씨 기세조 배위준(고려 시대 삼중대광 벽상공신)을 기세조이며, 배위준의 현손 배인경(5세) 충선왕떄 추밀원사를 지냈고 충숙왕때 흥안부원군에 봉해짐으로 후손들이 성산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묘는 실전 되었으며 성주군 성주읍 성주읍4길 흥안재에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흥안재 숭덕사에서 기세조 배위준과 흥안부원군 배인경의 위패를 봉안 매년 5월5일 향사를 지내고 있다. 배인경의 증손 배진손은 자가 사려, 호가 아당공이다. 고려말에 문과 급제 핀공부사를 지냈다. 슬하에 배규,배구,배현 삼형제를 두어 삼남 배현(9세)진사공파의 파조로 자는 중성, 호는 수당이다.1396년(태조5년) 성균관진사에 합격 덕을 세우고 학문을 크게 이루었다. 묘는 실전 되어 대가면 도남리 영각 옆에 보사단비가 세워져 있으며 매년 양력10월9일 향사일로 정하여 제를 드리고 있다. 파조 배현이 성주 광대원촌에 살다가 조선 중기 배주 대에 이르러, 지금의 성주군 대가면 도남리 뒷개 마을로 이주 등암 종가의 터전을 마련 지금까지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배주 자(子) 서암(배덕문)공이 별시 문과에 급제 여러 고을 군수를 역임하고, 고향 뒷개 마을에 귀향 제자를 길러왔으며, 성주 향교 교수 시절 임진왜란이 일어나 성주성이 함락되자 "누가 나와 함께 하겠는가"라며 일성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성주 제독으로 3대가 의병활동으로 왜적을 물리쳐 많은 전공을 세웠다. 

▶ 경북의 종가문화 성주 등암종가

▶ 2021년 제1회 성주 임진의병예술제 축하 공연

 

● 성주 뒷개 마을 주변의 유래와 전설 이야기

성주 성산배씨 의병창의 마을 소개 (휘 위준 30세손 형호 정리)

서암 배덕문(1525~1599) 선조께서 성주군 대가면 도남리 대금로192-10 도남재 주변에 마을을 형성해 종택을 중심으로 집성촌으로 번성했다.

국도 33호선에서 5리 가량 북쪽, 금수강산면 방면으로 갈밭(전인) 청용 뒷개(후포) 자리섬(전인)으로 세 개 부락에 백여 호 이상의 일족이 한 집안같이 단결해 살았다. 오백여 년 이어져 내려오는 도남리에는 선조들의 신도비가 파꽃처럼 서 있는 숭조대와 진사공 보사단비, 도남재와 옆으로 묵객의 시심을 돋게 하는 도용정 우물과 선조 등암, 괴재 선조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영각, 수령 삼백여 년의 배롱나무 등 유적과 노거수와 선돌에 얽힌 전설이 있다. 자리섬 마을을 치마폭으로 감싸고 있는 할미산성이 있고, 마을 입구에 수령 사오백 년 된 소나무와 팽나무 두 그루, 그 옆에 달팽이가 나무를 타는 듯한 모양으로 서 있는 선돌은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ㅇ 뒷개(후포)

 마을의 입구에서 보면 바닷가의 포구처럼 생겨 배가 나가고 들어오는 형상으로 새로운 문물에 의식이 깨어 있는 활기찬 마을이다. 땅의 끝은 바다이고 육지의 끝은 바다이듯 자손들은 각지에서 몫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ㅇ 자리섬(전인)

할미산성이 감싸듯 마을을 안고 있으며 마을은 둥근 복주머니처럼 생겼다. 안산이 문필봉같이 뾰족한 붓처럼 생겨서인지 교육자들이 많이 배출되고, 자손들은 크고 작은 단체에서 책임을 다하고 있다.

ㅇ 청용

할미산성의 능선으로 풍수적으로 용이 물을 찾아오는 형상처럼 도남천을 우측으로 두고 길게 이어져 있다. 배롱나무와 영각, 진사공 보사단 비석, 도남재와 도용정, 숭조대가 기슭을 따라 자리잡고 능선은 완만한 지형으로 바뀐다. 능선의 발등쯤 마을이 서고 앞으로 손에 잡힐 듯 배를 묶는 소나무와 팽나무 그리고 선돌이 있다.

ㅇ 갈밭(신안)

 갈대가 많아 갈대밭으로 불리다 갈밭으로 되었다. 구보룡골, 팔용골의 골짜기 이름처럼 일 가에서 구 부자 팔 부자로 자손들이 번창하고 더구나 마을 정면에 삼신할매 바위가 있어 다산의 의미를 더한다. 관련하여 자손들은 의학, 의술의 종사자가 많아 국민 건강에 일익을 다한다.

 

 ㅇ 할미산성

도남리 자리섬 마을을 안고 있는 산으로 북풍를 막아주며 좌청룡 우백호의 형상으로 해발 300미터의 완만한 곡선으로 산세가 곱다. 정상에는 수백 명이 놀이를 할 수 있는 고래 모양의 평지가 있다. 석축 사이로 자란 나무의 단풍이 아름다워 1960,70년대엔 초등학교의 가을 소풍을 가는 장소가 되기도 했으며, 동쪽으로 칠곡과 서쪽으로는 가야산을 조망한다.

역사에 의하면 할미산성은 삼국시대 유적으로 현재 일부만 남아 있어 축성 시기는 정확하지 않고 구전에 따르면 마고할미가 치마에 돌을 담아 노고산성과 금오산성을 함께 쌓았다고도 한다. 지리적으로는 대가면과 금수강산면의 경계이기도 하다.

 

ㅇ 도남재(도천서원)

조선 중엽의 유학자인 등암 배상룡, ()을 근본으로 덕은 드러내지 않고 의()를 실천한 도덕군자로 추앙하고, 괴재 배상호 형제의 학덕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1725(영조 원년) 유림에서 가천면 사뢰촌에 도천서원을 세워 제향을 올리다가 1786(정조 10) 현재의 자리(뒤개)로 이건 하였으나, 1868(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그 후 1900(고종 37) 문중에서 도남재를 건립하고 1975년 현 건물로 중건하였다.

 

ㅇ 영각

1868(고종 5) 도천서원이 철폐되어 영각을 건립, 등암 배상룡 선조의 위패와 영정을 봉안 향사를 올렸다. 건물의 노후로 1942년 중건하고 이후 2005년 도비로 중건하였다. 2024년 괴재 배상호 선조의 위패를 봉안하여 형제분을 함께 매년 음력 106일 제향을 올린다.

 

ㅇ 배롱나무(목백일홍)

영각 앞에는 수령 300여 년의 배롱나무 두 그루가 있다. 매미 노래 따라 꽃은 피어나 뀌뚜라미 소리 들으며, 등불을 밝힌 듯 붉은 꽃숭어리 수만 송이가 피어난다. 화무십일홍이 아닌 석달 열흘 불 밝히고 추수를 기다리는 황금들판과 함께 마을을 풍요롭게 한다. 배롱나무는 경상북도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ㅇ 숭조대

성산 배씨 선조들의 위업을 기리는 비석이 파꽃처럼 서 있다.

1922년 증 이조판서 서암 배덕문 선조의 신도비를 세우고,

20049월 증 병조판서 서강 배설 장군 신도비, 증 병조참의 고암 배건, 처사 등암 배상룡, 증 좌승지 괴재 배상호 선조의 유허비를 세웠다.

 20081월 증 병조판서 명암 배즙 선조의 유허비와 교남 배기훈 종친의 송덕비를 세웠다.

 

 ㅇ 팽나무와 삼신할매 바위(선바위)

성산배씨 집성촌인 도남1리 입구에는 오백여 년 된 소나무와 팽나무 두 그루가 있다그 옆으로 부드럽게 각이 진 힘이 넘쳐 보이는 바위가 우뚝 서 있다

전설에 의하면 아낙네들은 이 바위를 삼신할매 바위라 불렀고 남정네는 남근 바위라 했다. 영남의 영산인 가야산을 바라보며 우뚝 솟은 선바위는 큰 산 깊은 골짜기와 능선의 우람한 음양의 정기를 받는 듯 서 있다. 그리하여 마을은 다산과 풍요로 자손들은 골목을 지나 도회지로 흘러갔다.

아낙네들은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가족과 마을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며 바위 주변에 그림자를 남기고반면에 남정네들은 동상이몽으로 걸음을 하곤 했다.

그리하여 아무튼 몇몇 남정네는 작은 집을 두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래서 부인들은 부군이 애첩을 둘까 노심초사 애를 태웠다그러던 어느 날 밤 한 여인의 꿈에 선인이 나타나 마을의 재앙을 막아주는 비보림으로 팽나무를 심으라는 계시가 있었다. 하여 현재의 팽나무 두 그루가 바위를 가운데 두고 동서로 서 있으며 적절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그 후 마을은 더욱 평온하고 남정네들은 공익에 힘을 쏟아 임진왜란 때 의병을 창의한 마을로 기록되어, 의병예술제를 매년 개최하며 산화한 선조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현 시대로 돌아보면 이 전설은 어떤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을까.

삼신할매, 남근, 팽나무” 

삼신할매는 자손 번창과 화목으로, 남근은 용기와 건강으로, 팽나무의 무성함은 풍요와 인정으로 해석해 본다.

 

 ㅇ 배를 묶는 소나무(계선주)

서암 선조가 입향해 자리 잡으며 본 지형이 행주형 갯벌로 배가 떠난 나루라하여 마을 이름을 후포(뒷개)라 했고, 자리섬, 갈밭, 청용 등의 마을들이 바닷가에서 볼 수 있는 이름들로 지어졌다.

네 개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 같은 소나무가 입구에 수령 500여 년을 이어가고 있다. 키 높이에서 양팔을 벌린 듯 가지를 동서남북으로 펼친 모양은 고래등 같은 푸른 기와집인 듯하다.

이 소나무는 서암 선조의 손자 등암 처사가 떠난 배가 만선이 되어 돌아오면 묶어 둘 말뚝(계선주)이 필요하다 뜻에서 심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또 그 옆에 재관 종친이 수십 년 전에 심은 전나무가 몸피를 불리며 노송의 세손 되어 함께 가지를 흔들며 푸르름을 더하고 있다.

노송은 성주군 지정 보호수로 관리 되고 있다.

 

  등암 처사의 제자 만회정 송세빈의 견배지경세유정반노송유감헌시가 있다

 

그대 집 마당가의 외로운 소나무

일찍이 선인께서 직접 심은 것이지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는 소리를 내고 산달은 흰대

추억을 더듬는 자 눈물이 가슴을 적시네

 

후손 인당 재관 종친의 노송 보호수 칠언절구 헌시가 있다.

老松 保護樹

千年苦節四時靑 천년고절사시청/  천년의 굳은 절개로 사시에 푸르고

遺地鴉溪巨樹靈 유지아계거수령/  아계원의 유지에 신령스런 큰 나무네

鑠熱村童游石澗 삭열촌동유석간/  마을 아이들은 삭열의 더위에 시내에서 놀고

納涼野老到松亭 납량야노도송정/  촌노는 서늘한 곳을 찾아 송정에 이르네

南風北雪聞哀樂 남풍북설문애락/  남풍북설에 슬픔과 즐거움이 들리고

春露楸霜問否寧 춘로추상문부녕/  봄이슬 가을서리에 안부를 묻네

樅木同生和合洞 종목동생화합동/  전나무와 함께 자라는 화합하는 동이요

尋芳玩賞客笻停 심방완상객공정/  아름다운 경관을 구경하는 객의 지팡이 머무도다

 

 ㅇ도용정

가야산을 향하고 있는 도남재 옆 좌측에 마르지 않는 샘이 있다. 도남재 도천서원, 앞으로 종택이 있고 주위에 일족들이 일가를 이루어 골목이 이어지고 골목은 나뭇가지처럼 샘으로 연결되었다. 맑고 단물은 일족의 생명수가 되고 길손은 우물에 얼굴을 비추며 두레박을 내렸다.

또한 인당 종친의 도용정헌시가 판각되어 있다.

 

道湧井

全仁城下道原穿 전인성하도원천/  전인성 아래 도남재 둔덕을 뚫어

後浦根源湧水泉 후포근원용수천/  후포의 근원으로 샘물이 용솟음치네

賢士來賓生命飮 현사래빈생명음/  현사와 빈객이 와서 생명수를 마시며

鄕儒學德世孫傳 향유학덕세손전/ 향유의 선비가 학문을 배워 세손에 전승하리라


 

“견배지경세유정반노송유감(見裵持卿世維庭畔老松有感)
그대 집 마당가의 외로운 소나무(君家庭呼一孤松)
일찍이 선인께서 직접 심은 것이지(曾是先人手植封)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는 소리 내고 산달은 흰대(風樹有聲山月白)
추억을 더듬자 눈물이 가슴을 적시네 ( 摩挲追憶淚沾胸)
지은이 ⟪등암의 제자 송세빈 (만회정유고)⟫

▶ 마을 입구 노송

▶ 도남재와 영각

 

 ● 도천서원, 도남재, 도천사(영각) 내역 (재관 종친 제공)

 

 

2. 군수공파 : 순천(선월리, 법대리)

● 군수공파 연혁

군수공파(郡守公派)는 성산성주배씨(星山星州裵氏) 1세조 이신 고려삼중대광벽상공신(高麗三重大匡碧山功臣) 휘(諱)위준(位俊)공의 10세손이며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 휘(諱) 현(俔)공의 차남으로 영얌군수를 지낸 휘(諱) 영성(永成)조부님이 계파조(系派祖)이다 후손들의 세거지(世居地)는 순천,여수,고흥,벌교,구례,해남,하동 등이다.

● 군수공파 세거지(선월마을,대법마을)

1) 선월마을 유래는 순천시 해룡면 입향조(入鄕祖)는 14세손 통정대부(通政大夫) 휘(諱) 억련(億璉)공으로 1595년경 순천시 낙안면에서 해룡면 선월마을로 이거하였으며, 후손은 해룡면 선월리(40세대),대법리(25세대),성산리(5세대),신대리(5세대),서면 판교리(30세대)등 주로 농촌 지역에 세를 이루고 살았으나 국가경제의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농촌 인구가 극감하여 현재는 마을마다 노인 가구 몇 세대만 거주하고 있다.

2) 대법마을은 입향조(入鄕祖)는 20세 통정대부 휘(諱) 경신(璟臣)공으로 19세손 휘(諱) 윤장(胤章)공의 둘째 아들로 1730년경 선월마을에서 분가하여 이곳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 군수공파 세장지 연혁

군수공파 세장지(世葬地)는 순천시 해룡면 선원리 산54-1번지로 계파조(系派祖) 10세손 영암군수 휘(諱)영성(永成)공 이하 10~13세손까지 4세7위(4세7위) 분(합봉)과 해룡면 입향조(入鄕祖)이신 14세손 휘(諱)통정대부(通政大夫) 억련(億璉)공 이하 후손14~21세손까지 8세21위(八世 二十一位)분이 모셔져 있다. 군수공파 세장지 조성 경위는 계파조(系派祖)이신 휘(諱) 영성(永成)공 이하 10~13세손까지 4세7위(四世七位)분은 고흥군 점암면 작동 야산에 묘소가 있었어나 장기간 관리가 되지 않아 봉분만 희미하게 있을 뿐 신위(神位)를 알 수 없어 1981년 2월5일 순천시 해룡면 선월리 산64-3번지에 설단을 설치하여 모셔오다, 2023년 4월10일 순천시 해룡면 선월리 산54-1번지에 조성된 해룡면 입향조(入鄕祖) 14세손 통정대부(通政大夫) 휘(諱) 억련(億璉)공 묘역을 정비(平葬化)하면서 이곳으로 이장 합봉하여 모셨으며, 그간 이곳 묘역과 곳곳에 산재되어 모셔왔던 통정대부(通政大夫) 휘(諱) 억련(億璉)공 후손 14~21세손까지 21위 분을 이장하여 시류에 따라 평장(平葬)하여 모셨다.

 

3. 윤신파 : 상주(사벌 매호)

● 성산성주배씨 12세 윤신파 사벌매호촌 소개

성산성주배씨가 상주군 매호촌에 세거하게 된 것은 진사공 휘 현(俔) 선조 7대손이며 청백리(淸白吏) 휘 치(絺) 선조 5대손 되는 휘 복문(複文) 선조께서 성주에서 상주군 은척면 배(配) 강양이씨에 장가들어 유일남(有一男 )하여 그곳에서 세상을 떠나니 공(公)의 손자 되는 18세 휘 상홍(尙洪) 선조께서 평야지를 찾아 이곳 메악산 아래 매호촌에 자리하여 입향조가 되었다. 상홍(尙洪)선조는 등무과(登武科)하여 관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 하였으며 향(享)31세로 타개하니 그 후손들은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도 숭조(崇祖)의 정신으로 단합하여 한때는 30여호의 집성촌을 이루어 살아오다 지금은 사벌 매호와 예천용궁 ,충청도 지역에 친족들이 살고 있으며 시루에 따라 후손들이 객지로 나아가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사벌매호 가족묘원 조성은 후손들의 숭조(崇祖) 염원(念願)의 뜻을 모아 흩어저 있는 조상님들을 한 곳으로 모시기로 하여 2016년 봄부터 2017년 丁酉 閏 6월에 상주시 사벌국면 매호리 산39번지에 가족묘원(家族墓園)을 설치하였다. 이곳 사벌 매호리 산39번지는 26세 휘 제원 선조께서 문중산으로 제공하였으며 휘 제원(悌源)선조께서는 통훈대부 사헌부감찰(通訓大夫 司憲府監察)을 지냈다. 사업비는 총6,500여만원으로 상주시 중동면 유성석재에 의뢰 시공 준공하였다. 아직 문중의 가족묘원 성지(聖地)로서 부족하고 가꾸어야 할 후손들의 몫이 남아 있다.

● 사벌매호 가족묘원 사진

상주시 사벌국면 매호리 산39번지 내 윤신파(복문가) 가족묘원 조성(2017년6월)

성산성주배씨 진사공 휘 현(俔자) 선조 7대손 복문 선조께서 성주에서 상주 은척면으로 은둔하였으며 18세손 상홍 할아버지가 상주 사벌매호로 입향하여 집성촌을 이루워 살고 있으며, 지금은 사벌매호,예천 용궁,충북 청주 일원에 친족들이 살고 있음. 성산성주배씨 윤신파 친족들이 이곳 사벌매호 가족묘원을 조성16세 복문 할아버지을 중심으로 직계 선영들을 이곳에 모시고 매년 친족들이 한 곳에 모여 산소 벌초 후 시제를 지내고 있다.

4. 명암가 : 고령덕곡

● 명암가 집성촌 소개

휘 배즙(裵楫)(1564년 ~ 1598년)선조는 본관은 星山(星州) 字는 통중(通衆) 호(號)는 명암(明菴)이다. 父 서암 배덕문(裵德文)과 母 수원백씨(水原白氏)사이에서 三男으로 성주군 대가면 도남리에서 출생하여 1590년(선조23년)무과별시에 급제하여 훈련원습독과 사직(司直)에 제수되었다. 1592년(선조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부친 서암 배덕문꼐서 의병(義兵)을 창의(倡義)하여 적장 흑진구의 목을 벨 때 공(公)꼐서 참여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두 형 배설(裵楔),배건(裵楗)조카 배상용(裵尙龍)과 함께 참전하여 부상진(扶桑津) 개산진(開山津) 에서 전공을 세웠다. 1597년(선조30년) 정유재란 때 조방장(助防將)으로 백형 배설(楔) 경상우도수군절도사와 함께 한산도에서 형을 도와 청야작전을 펼쳐 대승을 거두었다. 그 후 수차례 왜군과의 전투에 참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1598년 11월19일 이순신, 명나라 장수 등자룡, 가리포첨사 이영남,낙안군수 방덕룡,흥양현감 고득장 등 많은 명장들이 전사한 노량진 해전에서 왜적 수군에게 포위되어 비분강개(悲墳慷槪)한 목소리로 왜군을 향해 바다의 기운을 맑게 할 수 있다면 이 한 목숨 미련없이 바치겠다고 호령(號令)하며 왜군 진영으로 종횡무진하여 싸우다 왜군이 쏜 탄환에 맞아 34세의 나이로 장열하게 순직 하였다. 1610년(광해2년) 선무원증2등공신에 녹훈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 되었다. 이어서 의금부지사(義禁府知事) 와 훈련원사(訓練院事)에 추종 되셨다. 이 사실은 주지(州志)와 영지(嶺志)에 기록되어 있다. 공(公)께서는 전란에 순직하여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어 묘소(墓所) 는 없으며, 그의 후손들이 고령군 덕곡면 노2리(서우재)에 50년 전에 제단비(祭壇碑)를 건립하여 430여 년을 후손들이 세거(世居)하며 공(公)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재실 만모재(晩慕齎)와 마을 입구에 공(公)과 그 후손 태해(泰海) ,세일(世逸), 진탁(振鐸) 4분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성산배씨 사현유지비(星山裵氏四賢遺址碑)가 세워져 있다. 마을 동쪽 양지 바른 야산 노2리 산57번지에 공(公)의 제단비 밑에 흩어져 있는 공의 후손(後孫)들 묘소와 공덕비를 한 곳에 모셔 합동묘역(合同墓域)을 조성하여 매년 양력11월10일 (음력10월14일) 시제를 지내고 있으며 후손들이 성지로 모시고 있다. 후손들이 세거(世居)하고 있는 마을 밑에 공께서 의병(義兵)들을 모아 훈련하며 가야산 깊은 계곡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에 칼을 갈았다 하여, 마검담(磨劍潭)이란 이름이 붙여졌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심은 느티나무(높이약20m둘레약 5m)가 있었는데 수명을 다해 고사(枯死)하고 저수지 공사로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게 안타까운 일이다 .배위는 덕산황씨 (德山黃氏) 사이에 一男 태헤(泰海) 군자감정(軍資監正)을 두었다.

▶ 재실 만모재

▶공덕비와 합동묘역(노리 산57번지)

▶종중 관라사

● 마을 전설 이야기(서우재와 마검단)

명곡동(明谷洞)이 서우재가 된 이유,   

서우재는 원래 서유재(鼠留在)라고 하는데 서유재는 “쥐가 머무르는 곳” 이라는 뜻이다. 옛날 이 마을에는 재앙이 닥쳐 젊은 사람이 죽고 멀쩡하던 사람이 미쳐서 집을 나가고 온 동네는 근심이 떠날 날이 없었다. 날이 저물어 가는 어느 날 마을을 지나던 스님(선인)이 어떤 집에서 하룻 밤 숙식을 하게 되었다. 저녁을 먹고 주인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이 사실을 전해 듣게 된 후 이튿날 스님이 이곳 산세를 두루 살펴보니 진산(암산) 코끼리 코의 형상이었다. 이를 상비산(象鼻山)이라고 했으며 가야산 정상 상왕봉에서 내려와 이곳 가야산 계곡물이 모여 흐르는 상비계곡에 코를 박고 있는 형상이었다. 코끼리가 갈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긴 코를 한 번 씩 휘두르면 온 동네는 쑥대밭이 되곤 하였다. 풍수학의 오수부동격(五獸不動格)에 의하면 쥐·고양이·개·호랑이·코끼리 다섯 동물은 서로 견재하는 관계로 일종의 압승(壓勝) 풍수라 할 수 있다. 호랑이가 날뛰는 마을에는 커다란 코끼리상을 만들어 재앙을 방지하고 서우재와 같이 코끼리가 물을 찾고자 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재앙은 쥐를 통하여 재압하는 방식을 쓴다. 쥐가 비록 작지만 코끼리 코안에 들어가서 괴롭히면 코끼리는 꼼짝없이 당하고 마는 처지이니 아무리 갈증이 나도 마음대로 코를 휘두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동네 이름을 서우재라고 지어주고 나니 그 후에 재앙이 사라지고 마을엔 평화가 찾아왔다. 오랜 세월 속에 서유재가 서우재로 상비산이 쌩버리로 명칭을 바꿔 부르게 되었다. 이제 그 계곡에 저수지가 생기고 지금을 둑을 높여 계곡까지 물이 차오르게 되어 코끼리는 물을 얻기 위하여 더 이상 많은 기운을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마검담(磨劍潭)의 전설 

지금은 저수지 둑으로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지만 옛날 이곳엔 수령이 600~700년이 된 고목 느티나무가 있었다. 나무를 중심으로 커다란 돌로 단을 쌓아 나무 그늘에서 행인들의 땀을 식혀주는 쉼터로 주위엔 평평한 장소가 있는 곳이었다. 그 옛날 이곳에 “배즙(裵楫) 장군”께서 임진왜란 때 의병을 훈련 시켰는데, 가야산 계곡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에 칼을 갈았다 하여 마검담(磨劍潭) 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지금은 저수지 시설 공사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게 안타깝지만, 그 후손들은 지금도 450여 년을 이 고장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5. 고암가 : 창녕

6. 경조가 : 상주 외남

● 집성촌 소개(경조가)

선조 휘는 시경이며 자는 재호로 父 윤경의 삼남 중 셋째로 1717년 5월18일 丁酉生 公은 가의대부 첨지 및 중추부사를 지냈으며, 성주에서 출생 선산으로 이거하였다가 후에 상주군 외남면에 이거 처음 상주에 입향한 선조다. 1775년 2월15일 을미년 卒 묘는 공성면 용신 산15번지 해좌 상석 있음. 숙부인 덕수이씨의 묘 하록 자좌에 상석 있음.

● 구릿들마을 유래

구릿들마을은 280년 전 조선중기 성산배씨 22세손 경조 선조가 이곳에 마을을 처음 개척 정착 하었으며, 입향조 경조 선조는 성주에서 출생하여 선산에서 일시 기거 하다 외남면 구릿들 마을에 입향 정착하여 후손들이 구릿들 배씨 집성촌을 이루며 50여 호의 가문으로 번영과 부를 누리며 살아왔다. 지금은 시류에 따라 많은 종친들이 객지로 떠나고 20여 호의 종친들이 고향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구릿들마을 유래을 살펴보면 마을 뒤 전답이 해오라기 백구(白鷗)가 날아오는 향상이라 하여 구래들 혹은 구릿들이라 불러 왔으며 구학(鷗鶴)이 평야에 앉는다 하여 구평(鷗坪)이라고도 불리어 왔다.

● 마을 전경 사진

● 묘소 전경 사진

상주시 공성면 용신 산 15번지 내 경조 선조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