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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성촌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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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남문중(서암공파) : 성주뒷개

성산 배씨 집성촌인 도남리는 뒷개(후포 ) 자리섬(전인) 갈밭(신안)은 대가면의 서쪽 33번 국도에서 금수강산면으로 오 리 정도 서북쪽에 위치해 있다. 

● 성주뒷개 마을의 지리적 환경

뒷개마을은 도남천 주변으로 자연 마을이 산재해 있는데 그 중에 성산배씨 등암 종가는 뒷개(후포) 마을이다. 서북쪽으로 뒷뫼(520m) 북쪽으로 같은 마을 자리섬(전인) 뒷산(300m) 할미산성이 있다. 뒷개마을은 1920년 대홍수로 마을 전체가 피해를 받아 주민들이 도남천 현재 자리와 갈밭, 청룡마을로 이주하고 도남천 건너편에 새로 이주한 마을도 뒷개라 불렀다. 원래 이곳은 갯벌이었는데 갯벌마을 뒷개를 후포라 불렀다. 서암 배덕문 선조께서 마을 형국이 행주형이어서 배가 떠난 뒤 남아 있는 나루라하여 뒷개마을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 뒷개(後浦)

이 마을은 성산배씨의 집성촌인데 서암 배덕문(1525~1602)이 복고를 정했고 아들 서강 배설(1551~1599)은 무과에 올라 임진왜란 때 원균을 도와 큰 공을 세웠고 뒤에 병조판서로 추증되었다. 배설의 아들 등암 배상룡(1574~1655)과 괴재 배상호는 文辞와 필법에 능한 명사였다. 마을 안에는 도남재와 등암 영각과 진사공 보사단비가 있고 숭조대에는 서암 배덕문 신도비 贈吏曹判書 배설 장군 신도비 贈兵曹參議 고암 裵楗 蕂巖 裵尙龍 贈 左承旨 槐齋 裵尙虎 贈兵曹參判 명암 裵楫 유허비가 있다.

● 자리섬(전인,城谷)

뒷개마을 동북으로 같은 마을권을 하고 있는 자리섬은 할미산성(300m) 아래 남향해 있는 마을이다. 이곳의 식호정은 고촌 裵正徽(1645~1709)가 辞官歸鄕해서 1707年(肅宗33年)에 오형제의 友誼를 담아 성주댐 아래 강정에 지었는데 1907년 200년째 되는 해에 후손들이 移築했다. 마을 안 전인재는 괴재 배상호를 추모하는 곳이다.

● 갈밭(蘆田, 新安)

뒷개마을 동쪽의 도로에서 조금 들어 앉은 마을이고 들머리에는 鵝溪(갈계) 院의 遺址와 천년 노송의 유서 깊은 역사의 현장이다.

▶ 도남1리 마을전체

▶ 자리섬 마을 전경

● 성산성주 배씨 진사공파 서암공(등암종가) 세계도

주토성의 하나인 성산배씨는 배인경이 고려충숙왕 때 흥안부원군에 봉해지면서 흥안(지금의 성주)을 본관으로 지금의 성산성주 배씨로 불리며 신라 개국 공신 지타공이 시조이며 고려 개국 공신 배현경이 중시조이며 성산배씨 기세조 배위준(고려 시대 삼중대광 벽상공신)을 기세조이며 배위준의 현손 배인경(5세) 충선왕떄 추밀원사를 지냈고 충숙왕때 흥안부원군에 봉해짐으로 후손들이 성산을 본관으로 삼아 셰계를 이어오고 있다. 묘는 실전되었으며 성주군 성주읍 성주읍4길 흥안재에 신도비가 세워져 있으며 흥안재 숭덕사에서 기세조 배위준과 흥안부원군 배인경의 위패를 봉안 매년 5월5일 향사를 지내고 있다. 배인경의 증손 배진손은 자가 사려, 호가 아당공이다. 고려말에 문과 급제 핀공부사를 지냈다. 슬하에 배규,배구,배현 삼형제를 두어 삼남 배현(9세)진사공파의 파조로 자는 중성, 호는 수당이다.1396년(태조5년) 성균관진사에 합격 덕을 세우고 학문을 크게 이루었다. 묘는 실전되어 대가면 도남리 등암 영각 옆에 보사단비가 세워져 있으며 매년 양력10월9일 향사일로 정하여 제를 드리고 있다. 파조 배현이 성주 광대원촌에 살다가 조선중기 배주대에 이르러 지금의 성주군 대가면 도남리 뒷개마을로 이주 등암종가의 터전을 마련 지금까지 세계를 이루어 오고 있다. 배주 자(子) 서암(배덕문)공이 별시 문과에 급제 여러 고을 군수를 역임하다가 고향이 뒷개마을에 낙향 제자를 길렀왔으며, 성주향교 교수 시 임진왜란이 일어나 성주성이 함락되자 "누가 나와 함께 하겠는가"라며 일성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성주제독으로 3대가 의병활동으로 왜적을 물리쳐 많은 전공을 세웠다. 오늘날의 성산성주 배씨 진사공파 명문 가문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었다.

▶ 경북의 종가문화 성주등암종가

▶ 2021년 제1회 성주임진의병기림예술제 축하 공연

● 성주 뒷개 마을의 주변의 유래와 전설 이야기

▶할미산성 유래 : 도남리 자리섬 마을 뒷산230m높이에 할미산성이 있다.할미산성은 삼국 시대 관방 유적으로 현재일부만 남아 있어 축성시기는알 수 없고 이성은 노고성으로 불리며 구전에 따르면 마고할미가 치마에 돌을담아 노고산성과 금오산성을 함께 쌓았다고 한다.또 독용산성의 장군 김덕의 부하들이 할미산성을 쌓았다고도 전해온다.그리고 쌀을보관하던곳이라 합미산성이라고 부른다.할미산성은 성주군 금수면 명천리와 대가면 도남리 일대에걸쳐 있다.성주군 며천리 윗수름재의말단부 부터 도장골산의 정상주를 중심으로 축성되어 있다.

▶뒷개마을은 원래 이곳은 갯벌이 있는데 서암 배덕문이 마을의 형국이 행주형이어서 배가 떠난지 뒤 남아 있는 나루라하여 이마을을 뒷개(후포)라 불렀다는 이야기 이다.마을 입구에 노송 한 그루는 등암 배상룡이 행주형 마을에 배를 묶어 둘 말뚝이 있어야 한다는 뜻에서 1620년(광해군12)무렵에 이노송을 심었다고 전해진다.등암이 세상을 따난 뒤 그의 문인인 만회정 송세빈과 아들 배세유와 함께 이 노송을 보고 칠언절구의 시를 짓었다

“견배지경세유정반노송유감(見裵持卿世維庭畔老松有感)
그대 집 마당 가의 외로운 소나무(君家庭呼一孤松)
일찍이 선인께서 직접 심은 것이지(曾是先人手植封)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는 소리 내고 산달은 흰대(風樹有聲山月白)
추억을 더듬자 눈물이 가슴을 적시네 ( 摩挲追憶淚沾胸)
지은이 ⟪등암의 제자 송세빈 (만회정유고)⟫

▶ 갈밭입구 노송

▶도남재와 등암영곽

도용정

 

● 삼신할매(소원) 바위 또는 솟대바위의 전설(배재관씨 제공)

● 도천서원, 도남재,도천사(영각) 내역(배재관씨 제공)

● 경조가집성촌 소개

선조는 휘는 시경이며 자는 재호로父윤경의 삼남중 셋째로1717년5월18일丁酉生 公은 가의대부 첨지 및 중추부사를 지내셨으며 성주에서 출생 선산으로 이거하였다가 후에 상주군 외남면에 이거 처음 상주에 이거 입향하신 선조이시다.1775년2월15일을미년卒묘는 공성면 용신 산15번지 해좌 상석있음.숙부이은 덕수이씨공의묘 하록 자좌에 상석 있음.

● 구릿들마을 유래

구릿들마을은280년전 조선중기 성산배씨22세손 경조 선조가 이곳에 마을을 처음 개척 정착 하었으며 입향조 경조 선조는 성주에서 출생하여 선산에서 일시 기거 하시다가 외남면 구릿들 마을에 입향 정착하여 후손들이 구릿들배씨 집성촌을 이루며50여호의 가문으로 번영과 부를 누리며 살아왔습니다.지금은 시류에 따라 많은 종친들이 객지로 떠나고20여호의 종친들이 고향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구릿뜰마을 유래을 살펴보며 마을 뒷 전답이 해오라기 백구(白鷗)가 나라오는 향상이라 하여 구래들 혹은 구릿들이라 불러 왔으며 구학(鷗鶴)이 평야에 앉는다 하여 구평(鷗坪)이라고도 불리어 왔습니다.

● 성산성주배씨12세 윤신파 사벌매호촌 집성촌 소개

선조(先祖)께서 상주군 매호촌에 입향(入鄕)하게 된 것은 진사공 휘 현(俔)자 할아버지7대손이시며 청백리(淸白吏)휘 치(絺)자 할아버지5대손 되시는 휘 복문(複文)할아버지께서 임진왜란시 세상이 어지러워 성주에서 상주군 은척면에 은둔하여 배(配)강양이씨에 장가들어 유일남(有一男)하여 그곳에서 세상을 떠나시니 공(公)의 손자 되시는18세 휘 상홍(尙洪)할아버지께서400여년전에 평야지를 찾아 이곳 메악산 아래 매호촌에 자리하여 입향조가 되었다.상홍(尙洪)할아버지는 등무과(登武科)하여 관 절충장군 용양위부호군 하셨으며 향(享)31세로 타개하시니 그 후손들은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 한갓 숭조(崇祖)의 정신으로 단합하여 한때는30여호의 집성촌을 이루워 살아오다가 지금은 사벌 매호와 예천용궁에 친족들이 살고있으며 시루에 따라 후손들이 객지로 나아가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 사벌매호 가족묘원 조성

후손들의 숭조의 염원을 모아 흩어저 있는 조상님들을 한곳으로 모시기로하였으니2017년丁酉閏月에 완성하다. 이곳 매호리 산29번지로26세 휘 제원 할아버지께서 문중산으로 제공하였으며 휘 제원(悌源)할아버지꼐서는 통훈대부 사헌부 감찰(通訓大夫 司憲府 監察)을 지내셔다. 사업비는 당초6,500여만원으로 상주시 중동면 유성석재에서 시공 완성하였다.아직까지 상주 매호 문중의 성지로서 부족하고 가꾸어야할 후손들어 몫은 남아 있습니다.

● 명암공배즙(裵楫)장군님의서우재와 마검담(磨劍潭)마을전설 이야기

● 명곡동(明谷洞)이 서우재가 된 이유

서우재는 원래 서유재(鼠留在)라고 하는데 서유재는“쥐가 머무르는 곳”이라는 뜻이다 옛날 옛적 이 마을에는 재앙이 닥쳐 젊은 사람이 죽고 멀쩡하던 사람이 미쳐서 집을 나가고 온 동내는 근심이 떠날 날이 없었다. 날이 저물어가는 어느날 이 마을을 지나던 스님(선인)이 어떤 집에서 하룻밤 숙식을 하게 되었다.저녁을 먹고 주인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이 사실을 전해 듣게 된 후 이튿날 스님이 이곳 산세를 두루 살펴보니 진산(암산)코끼리 코의 형상이었다.이를 상비산(象鼻山)이라고 했으며 가야산 정상 상왕봉에서 내려와 이곳 가야산 계곡물이 모여 흐르는 상비계곡에 코를 박고 있는 형상이었다.코끼리가 갈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긴 코를 한번 씩 휘두르면 온 동네는 쑥대밭이 되곤 하였다. 풍수학의 오수부동격(五獸不動格)에 의하면 쥐·고양이·개·호랑이·코끼리 다섯 동물은 서로 견재하는 관계로 일종의 압승(壓勝)풍수라 할 수 있다.호랑이가 날뛰는 마을에는 커다란 코끼리상을 만들어 재앙을 방지하고 서우재와 같이 코끼리가 물을 찾고자 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재앙은 쥐를 통하여 재압하는 방식을 쓴다.쥐가 비록 작지만 코끼리 코안에 들어가서 괴롭히면 코끼리는 꼼짝없이 당하고 마는 처지이니 아무리 갈증이 나도 마음대로 코를 휘두를 수 없는 것이다.그래서 이 동네 이름을 서유재라고 지어주고 나니 그 후에 재앙이 사라지고 마을엔 평화가 찾아왔다.오랜 세월 속에 서유재가 서우재로 상비산이 쌩버리로 명칭을 바꿔부르게 되었다.이제 그 계곡에 저수지가 생기고 지금을 뚝을 높여 계곡까지 물이 차오르게 되어 코끼리는 물을 얻기 위하여 더이상 많은 기운을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 마검담(磨劍潭)의 전설

지금은 저수지 뚝으로 옛모습을 찾아볼 수 없지만 옛날에 이곳엔 수령이600~700년이 된 고목 느티나무가 있었다.나무를 중심으로 커다란 돌로 단을 쌓아 나무그늘에서 행인들의 땀을 식혀주는 쉼터로 주위엔 평평한 장소가 있는 곳이었다. 그 옛날 이곳에“배즙(裵楫)장군”께서 임진왜란 때 의병을 훈련시키셨는데,가야산 계곡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에 칼을 갈았다하여 마검담(磨劍潭)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지금은 저수지 시설 공사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게 안타깝지만,그 후손들은 지금도450여년을 이 고장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2. 군수공파 : 순천(선월리, 법대리)

● 군수공파 연혁

군수공파(郡守公派)는 성산성주배씨(星山星州裵氏) 1세조 이신 고려삼중대광벽상공신(高麗三重大匡碧山功臣) 휘(諱)위준(位俊)공의 10세손이며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 휘(諱) 현(俔)공의 차남으로 영얌군수를 지낸 휘(諱) 영성(永成)조부님이 계파조(系派祖)이다 후손들의 세거지(世居地)는 순천,여수,고흥,벌교,구례,해남,하동 등이다.

● 군수공파 세거지(선월마을,대법마을)

1.선월마을 유래는 순천시 해룡면 입향조(入鄕祖)는 14세손 통정대부(通政大夫) 휘(諱) 억련(億璉)공으로 1595년경 순천시 낙안면에서 해룡면 선월마을로 이거하셨으며,후손은 해룡면 선월리(40세대),대법리(25세대),성산리(5세대),신대리(5세대),서면 판교리(30세대)등 주로 농촌지역에 세를 이루고 살았으나 국가경제의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농촌 인구가 극감하여 현재는 마을마다 노인가구 몇세대씩만 거주하고 있다.

2.대법마을은 입향조(入鄕祖)는 20세 통정대부 휘(諱) 경신(璟臣)공으로 19세손 휘(諱) 윤장(胤章)공의 둘째 아들로 1730년경 선월마을에서 분가하여 이곳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 군수공파 세장지 연혁

군수공파 세장지(世葬地)는 순천시 해룡면 선원리 산54-1번지로 계파조(系派祖) 10세손 영암군수 휘(諱)영성(永成)공 이하10~13세손 까지4세7위(4세7위) 분(합봉)과 해룡면 입향조(入鄕祖)이신 14세손 휘(諱)통정대부(通政大夫) 억련(億璉)공 이하 후손14~21세손까지 8세21위(八世 二十一位)분이 모셔저 있다. 군수공피 세장지 조성경위는 계파조(系派祖)이신 휘(諱) 영성(永成)공이하 10~13새손까지 4세7위(四世七位)분은 고흥군 점암면 작동 야산에 묘소가 있었어나 장기간 관리가 되지 않아 봉분만 희미하게 있을 뿐 신위(神位)를 알수 없어 1981년2월5일 순천시 해룡면 선월리 산64-3번지에 설단을 설치하여 모셔오다, 2023년 4월10일 순천시 해룡면 선월리 산54-1번지에 조성된 해룡면 입향조(入鄕祖) 14세손 통정대부(通政大夫) 휘(諱) 억련(億璉)공 묘역을 정비(平葬化)하면서 이곳으로 이장 합봉하여 모셨으며 그간 이곳 묘역과 곳곳에 산재되어 모셔왔던 통정대부(通政大夫) 휘(諱) 억련(億璉)공 후손 14~21세손까지 21위 분을 이장하여 시류에따라평장(平葬)하여 모셨다.

3. 윤신파 : 상주(사벌 매호)

● 성산성주배씨 12세 윤신파 사벌매호촌 집성촌 소개

성산성주배씨가 상주군 매호촌에 세거하게 된 것은 진사공 휘 현(俔)자 할아버지 7대손이시며 청백리(淸白吏) 휘 치(絺)자 할아버지 5대손 되시는 휘 복문(複文)할아버지께서 성주에서 상주군 은척면 배(配) 강양이씨에 장가들어 유일남(有一男 )하여 그곳에서 세상을 떠나시니 공(公)의 손자 되시는 18세 휘 상홍(尙洪) 할아버지께서 평야지를 찾아 이곳 메악산 아래 매호촌에 자리하여 입향조가 되었다.상홍(尙洪)할아버지는 등무과(登武科)하여 관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 허셨으며 향(享)31세로 타개하시니 그 후손들은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 한갓 숭조(崇祖)의 정신으로 단합하여 한때는 30여호의 집성촌을 이루워 살아오다가 지금은 사벌 매호와 예천용궁,충청도 지역에 친족들이 살고있으며 시루에 따라 후손들이 객지로 나아가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벌매호 가족묘원 조성은 후손들의 숭조(崇祖)의 염원(念願)을 뜻모아 흩어저 있는 조상님들을 한곳으로 모시기로 하여 2016년 봄부터 시작 2017년 丁酉閏 6월에 상주시 사벌국면 매호리 산39번지에 가족묘원(家族墓園)을 설치하였습니다.이곳 사벌 매호리 산39번지는 26세 휘 제원 할아버지께서 문중산으로 제공하였으며 휘 제원(悌源)할아버지께서는 통훈대부 사헌부감찰(通訓大夫 司憲府監察)을 지내셨습니다. 사업비는 총6,500여만원으로 상주시 중동면 유성석재에 의뢰 시공 준공하였다.아직까지 문중의 가족묘원 성지(聖地)로서 부족하고 가꾸어야할 후손들어 몫은 남아 있습니다.

● 사벌매호 가족묘원 사진

상주시 사벌국면 매호리 산39번지 내 윤신파(복문가) 가족묘원 조성(2017년6월)

성산성주배씨 진사공 휘 현(俔자) 할아버지 7대손 복문 할아버지가 성주에서 상주 은척면으로 은둔하였으며 18세손 상홍 할아버지가 상주 사벌매호로 입향하여 집성촌을 이루워 살고 있으며 지금은 사벌매호,예천용궁,충북 청주 일원에 친족들이 살고 있음. 성산성주배씨 윤신파 친족들이 이곳 사벌매호 가족묘원을 조성16세 복문 할아버지을 중심으로 직계 선영들을 이곳에 모시고 매년 친족들이 한곳에 모여 산소벌초후 시제를 지내고 있음.

4. 명암가 : 고령덕곡

● 명암가 집성촌소개

휘 배즙(裵楫)(1564년 ~ 1598년)선조님은 본관은 星山(星州) 字는 통중(通衆) 호(號)는 명암(明菴)이다. 父 서암 배덕문(裵德文)과 母 수원백씨(水原白氏)사이에서 三男으로 성주군 대가면 도남리에서 출생하여 1590년(선조23년)무과별씨에 급제하여 훈련원습독과 사직(司直)에 제수되었다. 1592년(선조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부친 서암 배덕문꼐서 의병(義兵)을 창의(倡義)하여 적장 흑진구의 목을벨 때 공(公)꼐서 참여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두형 배설(裵楔),배건(裵楗)조카 배상용(裵尙龍)과 함께 참전하여 부상진(扶桑津) 개산진(開山津) 에서 전공을 세웠다. 1597년(선조30년) 정유재란때 조방장(助防將)으로 백형 배설(楔) 경상우도수군절도사와 함께 한산도에서 형을 도와 청야작전을 펼쳐 대승을 거두었다. 그후 수차례 왜군과의 전투에 참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1598년 11월19일 이순신,명나라장수 등자룡,가리포첨사 이영남,낙안군수 방덕룡,흥양현감 고득장등 많은 명장들이 전사한 노량진 해전에서 왜적수군에게 포위되어 비분강개(悲墳慷槪)한 목소리로 왜군을향해 바다의 기운을 맑게 할수있다면 이 한목숨 미련없이 바치겠다고 호령(號令)하며 왜군 진영으로 종횡무진하여 싸우시다 왜군이 쏜 탄환에 맞아 34세의 나이로 장열하게 순직 하시였다. 1610년(광해2년) 선무원증2등공신에 녹훈되고 거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 되셨다. 이어서 의금부지사(義禁府知事) 와 훈련원사(訓練院事)에 추종 되셨다. 이사실은 주지(州志)와 영지(嶺志)에 기록되어 있다. 공(公)께서는 전란에 순직하시어 그 흔적을 찾을수 없어 묘소(墓所) 는 없으며 그의 후손들이 고령군 덕곡면 노2리(서우재)에 50년전에 제단비(祭壇碑)를 건립하여 430여년을 후손들이 세거(世居)하며 공(公)의 업적을 기리고 있으며 재실 만모재(晩慕齎)와 마을입구에 공(公)과 그후손 태해(泰海),세일(世逸),진탁(振鐸) 4분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성산배씨사현유지비(星山裵氏四賢遺址碑)가 세워져 있으며 마을 동쪽 양지바른 야산 노2리 산57번지에 공(公)의 제단비 밑에 흩어져있는 公의 후손(後孫)들 묘소와 공덕비를 한곳에 모셔 합동묘역(合同墓域)을 조성하여 매년 양력11월10일 (음력10월14일) 시제를 지내고 있으며 후손들이 성지로 모시고 있습니다.후손들이 세거(世居)하고 있는 마을 밑에 公께서 의병(義兵)들을 모아 훈련하시며 가야산 깊은 계곡에서 내려온는 맑은 물에 칼을 갈았다 하여 마검담(磨劍潭)이란 이름이 붙쳐졌으며 이를 기념하기위하여 심은 느티나무(높이약20m둘레약 5m)가 있었는데 수명을다해 고사(枯死)하고 저수지 공사로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수 없는게 안타까운 일이다.배위는 덕산황씨 (德山黃氏) 사이에 一男 테헤(泰海) 군자감정(軍資監正)을 두셨다.

▶ 재실 마모재

▶공덕비와 합동묘역(노리산57번지)

▶종중 관라사

● 마을전설 이야기(서우재와 마검단)

명곡동(明谷洞)이 서우재가 된 이유 서우재는 원래 서유재(鼠留在)라고 하는데 서유재는 “쥐가 머무르는 곳” 이라는 뜻이다 옛날 옛적 이 마을에는 재앙이 닥쳐 젊은 사람이 죽고 멀쩡하던 사람이 미쳐서 집을 나가고 온 동내는 근심이 떠날 날이 없었다. 날이 저물어가는 어느날 이 마을을 지나던 스님(선인)이 어떤 집에서 하룻밤 숙식을 하게 되었다. 저녁을 먹고 주인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이 사실을 전해 듣게 된 후 이튿날 스님이 이곳 산세를 두루 살펴보니 진산(암산) 코끼리 코의 형상이었다. 이를 상비산(象鼻山)이라고 했으며 가야산 정상 상왕봉에서 내려와 이곳 가야산 계곡물이 모여 흐르는 상비계곡에 코를 박고 있는 형상이었다. 코끼리가 갈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긴 코를 한번 씩 휘두르면 온 동네는 쑥대밭이 되곤 하였다. 풍수학의 오수부동격(五獸不動格)에 의하면 쥐·고양이·개·호랑이·코끼리 다섯 동물은 서로 견재하는 관계로 일종의 압승(壓勝) 풍수라 할 수 있다. 호랑이가 날뛰는 마을에는 커다란 코끼리상을 만들어 재앙을 방지하고 서우재와 같이 코끼리가 물을 찾고자 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재앙은 쥐를 통하여 재압하는 방식을 쓴다. 쥐가 비록 작지만 코끼리 코안에 들어가서 괴롭히면 코끼리는 꼼짝없이 당하고 마는 처지이니 아무리 갈증이 나도 마음대로 코를 휘두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동네 이름을 서유재라고 지어주고 나니 그 후에 재앙이 사라지고 마을엔 평화가 찾아왔다. 오랜 세월 속에 서유재가 서우재로 상비산이 쌩버리로 명칭을 바꿔부르게 되었다. 이제 그 계곡에 저수지가 생기고 지금을 뚝을 높여 계곡까지 물이 차오르게 되어 코끼리는 물을 얻기 위하여 더이상 많은 기운을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마검담(磨劍潭)의 전설 지금은 저수지 뚝으로 옛모습을 찾아볼 수 없지만 옛날에 이곳엔 수령이 600~700년이 된 고목 느티나무가 있었다. 나무를 중심으로 커다란 돌로 단을 쌓아 나무그늘에서 행인들의 땀을 식혀주는 쉼터로 주위엔 평평한 장소가 있는 곳이었다. 그 옛날 이곳에 “배즙(裵楫) 장군”께서 임진왜란 때 의병을 훈련시키셨는데, 가야산 계곡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에 칼을 갈았다하여 마검담(磨劍潭) 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지금은 저수지 시설 공사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게 안타깝지만, 그 후손들은 지금도 450여년을 이 고장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5. 고암가 : 창녕

5. 경조가 : 상주 외남

● 집성촌 소개(경조가)

선조는 휘는 시경이며 자는 재호로 父 윤경의 삼남중 셋째로 1717년 5월18일 丁酉生 公은 가의대부 첨지 및 중추부사를 지내셨으며 성주에서 출생 선산으로 이거하였다가 후에 상주군 외남면에 이거 처음 상주에 이거 입향하신 선조이시다.1775년 2월15일을미년 卒 묘는 공성면 용신 산15번지 해좌 상석있음.숙부이은 덕수이씨공의묘 하록 자좌에 상석 있음.

● 구릿들마을 유래

구릿들마을은 280년전 조선중기 성산배씨 22세손 경조 선조가 이곳에 마을을 처음 개척 정착 하었으며 입향조 경조 선조는 성주에서 출생하여 선산에서 일시 기거 하시다가 외남면 구릿들 마을에 입향 정착하여 후손들이 구릿들배씨 집성촌을 이루며 50여호의 가문으로 번영과 부를 누리며 살아왔습니다.지금은 시류에 따라 많은 종친들이 객지로 떠나고 20여호의 종친들이 고향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구릿뜰마을 유래을 살펴보며 마을 뒷 전답이 해오라기 백구(白鷗)가 나라오는 향상이라 하여 구래들 혹은 구릿들이라 불러 왔으며 구학(鷗鶴)이 평야에 앉는다 하여 구평(鷗坪)이라고도 불리어 왔습니다.

● 마을전경 사진

● 묘소전경 사진

상주시 공성면 용신 산15번지 내 경조 선조묘